종교개혁 이전 초기 종교개혁의 간략한 역사 흐름과 교회론 형성 과정
(2018년 10월 19일 새영광 교회에서 열린 한국목회 세미나 모임에서 발표한 내용을 후에 정리한 것입니다.)
1. 체코종교개혁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배경
1) 흐로마드카 인물 연구로 인하여 체코종교개혁을 공부하게되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2차세계대전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관심이 결국 체코선교사로 이끌었고, 체코 선교사로서 이미 체코에서 활동하신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 체코 슬로바키아 교회를 방문하며 교회의 활동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신학자 <<흐로마드카 (1889-1969) >>를 알게됩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시대때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대화를 노력하였습니다. 그의 신학은 소위 제3세계신학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차이점은 상황화와 해석학의 토대에 있는 제3세계신학과 달리 체코종교개혁전통에 토대를 두고있었습니다. 이것은 제게 충격이었고, 그의 신학을 더 이해하기 위해 체코종교개혁 공부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2) 프로테스탄트 정체성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체코에서 제일 많이 들었고 그리고 지금도 가끔 받고 있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왜 너는 장로교회 교인인가?>> 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질문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10여년 이상 시간이 흐른 뒤에 이 질문은 저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인것을 알았습니다. 유럽의 크리스천 정체성은 30년 전쟁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지역과 민족에 따른 교파형성의 오늘날 유럽 기독교 지형이 형성되었습니다. 중부유럽에서 개혁교회로 불리우는 장로교회는 헝가리 민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헝가리인이 아닌 제가 어떻게 개혁교회 (장로교회) 교인이 되었는지 저의 기독교 정체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3) 교단(교회)의식의 부재에 대한 고민때문이었습니다.
신앙 정체성이 뚜렷한 역사성을 갖고있는 유럽 기독교파들은 <<교단 (denomination)>>이란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않고 <<교회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같은 교리와 전통을 갖는 지역교회들은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를 옮긴다는 것은 지역교회의 이전이 아니라 다른 전통과 교리를 갖고 있는 타교파로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유럽교회의 지형안에서 우리 교단의 희박한 교파(같은 전통과 교리의 교회)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pck 선교사가 되었는가? 각자도생과도 같은 현재의 신학교육 시스템과 현장교회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같은 교회>>임을 느낄 수 있을까? 질문을 하게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실천신학적, 성서신학적 반추들은 풍성하지만, 실천적 숙고와 대안적 적용을 위해 개신교회의 근원인 개혁전통과 그 정신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2. 교회개혁 그룹의 출현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 교회가 출현했을 때 그 교회는 유대교의 한 분파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교회 (초대교회)는 유대주의와 로마제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못하였습니다. 불법단체로 박해를 받으면서 교리와 제도가 개혁되어갔습니다. 처음에 기독교회는 복음을 할례 문화에서 해석을 하다가, 기독교가 유대권을 벗어나서 전파되자 복음은 믿음으로 의롭게된다는 이신칭의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히브리파 중심과 사도 중심의 제도를 가지고 있다가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하는 그룹 (히브리파)와 헬라어를 모국어로 하는 그룹(헬라파) 간에 과부 구제 활동을 둘러싸고 문제가 일어나자 사도들은 말씀증언하는 일을 맡고 교회의 모든 일은 일곱집사를 세웁니다. 이때 일곱집사는 모두 헬라파에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발전되던 초기 기독교회는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로마제국으로부터 집회와 포교의 자유를 얻어 제도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11세기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열되고, 14-15세기에 서방교회 대분열(세명의 교황이 세워졌음)이 일어납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분열의 시기에 교회개혁을 주장하던 그룹들이 출현합니다. 마치 초기 기독교회가 유대주의와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던것처럼, 교회는 개혁그룹을 <<이단>>으로 낙인이 찍어 박해를 합니다. 1233년에 이단을 심사하는 조직인 <<종교재판>>이 설립됩니다. 처음에 종교재판은 비상설기구였다가, 점점 상설화되어 갑니다. 종교재판은 이단을 심사하고, 도망을 가거나, 깊은 숲속이나 토굴에 은둔을 하고 있는 이단을 추적하고, 신앙을 숨기는 방편으로 소금운송의 운송일이나 도시나 마을 개발 노동자로 이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단을 찾아내어 재판에 세워 처형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때 이단은 모두 기존의 교회 질서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개혁 그룹들이었습니다.
3. 12세기 왈도 개혁그룹 출현
12세기에 대표적인 이단은 <<페트루스 발데제 (1140-1217)>> 영어 발음으로 <<왈도>> 또는 <<발도 >>로 한국에는 소개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프랑스 리용의 부유한 상인 출신입니다. 그가 마태복음 5장과 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1176년에 빈민을 위한 무료급식회를 조직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밥을 나눠주다가 알게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교회론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국적을 자연스럽게 갖듯이, 당시 기독교 제국인 유럽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무조건 기독교 교인이 됩니다. 그리고 황제가 통치하는 세속나라와 구별되게 이 기독교제국인 종교의 나라(교회)의 공용어는 라틴어였습니다. 이 라틴어는 당시에 성직자와 지식인 소수만이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성경을 일반 교인들이 지금처럼 알필요가 없었습니다. 일반 교인들이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 성직자들을 통해야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제도가 교회의 <<성직계급제도-교계제도>>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교회 교인이 된다는 것이 곧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화되는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도록 <<성사제도>>를 두었습니다. 예를들어 출생신고와 같은 유아세례 성사, 오늘날 주민등록 신고와 같은 교리훈련의 견진성사, 성찬에 참예하는 성체성사, 죄를 범할 때 회개하는 고해성사, 질병이나 낙심할 때 치유와 회복을 얻게하는 병자성사, 결혼의 혼인성사, 안수식의 성품성사 등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교인들의 영적삶을 7개의 성사로 이끌고, 수도원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과 병자들을 돌보고, 무지한자들을 교육해서 계몽을하고, 가난한자를 구제하고, 토지를 개간해서 생산성을 높여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의 신뢰와 존경을 받고, 권위를 갖게되면서, 점차 교회와 수도원이 타락해지고, 가난한자와 약자들이 교회의 소외계층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돌봄을 받지 못하던 교회의 소외계층들에게 왈도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소개했고 그들은 그 말씀을 통해 치유와 회복을 체험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일반 교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그들의 모국어로 번역을 하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직자 중심의 <<성직계급제도>>의 교회를 성경의 초대교회처럼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려는 운동을 시작하게되었습니다.
4. 14세기 체코 보헤미아 종교개혁 그룹 출현
14세기 초에 체코 보헤미아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얀 밀리치 (1320 또는 1325 – 1374) 라는 프라하 한 지역교회 책임을 맡은 사제였습니다. 그가 맡은 교회는 프라하 구시가 광장 에서 블타바 강변쪽으로 조금 벗어나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살았고, 성매매가 활발히 일어났던 사창가였습니다. 보헤미아왕이면서 독일왕이었던 카렐 4세가 1346년에 신성로마 황제가 되면서 그가 거주하던 프라하가 신성제국의 중심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때 프라하는 도시가 번창을 하게되었습니다. 우선 카렐은 알프스산맥 북쪽으로 처음 1348년에 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프라하에서 70키로 미터 떨어진 곳에 은광이 있고 은으로 화폐가 발행되어 당시에 유럽 통화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게르만 민족 출신들을 비롯해서 많은 유럽 지식인들이 프라하 대학으로 몰려왔고, 상업이 발전되면서 유럽과 아시아 쪽에서 많은 상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외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도시가 활발해지자 동시에 가난한 여성들의 성매매도 많아졌습니다.
이들이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들의 담임 목사격인 사제 얀 밀리치는 죄용서를 선포하였지만, 같은 여성들이 반복적으로 고해성사를 하자 얀 밀리치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왜? 고해성사를 한 여성들이 같은 죄를 반복할까? 그 여성들의 입장에서 볼때, 그들이 교회에 오지만 복음을 직접 듣지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합니다. 그래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을 모두 모아 하루에 9번 예배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체코어로 드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여 읽게하고, 성만찬을 예수님이 시행한대로 떡과 잔을 모두 평신도에게 주는 이종성찬 (당시교회는 떡만 주는)을 시행했습니다. 그결과 회개를 하고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않는 여성들이 200명이 넘었다는 기록이있습니다. 프라하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14세기 초의 일입니다. 이 예배 공동체를 <<새예루살렘>.이라고 하였습니다.
5. 교회개혁파들의 일관된 프로그램들
12세기와 14세기 그리고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교회개혁그룹은 200여년간의 간격으로 징검다리 처럼 일어났습니다. 12세기 프랑스의 왈도와 14세기 보헤미아의 얀 밀리치 그리고 16세기 루터와 칼빈은 지금처럼 위성과 인터넷 통신망을 가지고 서로 정보를 교류할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개의 개혁파들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자국어로 설교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떡과 잔을 모두 받는 성만찬을 하였고, 성직자를 배제한 하나님과의 직접적 만남과 초대교회의 공동체 구현을 공통되게 주장하였다는 점입니다. 200년을 널뛰기 하며 등장한 개혁그룹들의 개혁 프로그램이 동일한 것은 주목할만합니다. 이것은 개혁(개신) 교회의 정신이 일치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6. 15세기 체코 보헤미아는 유럽 교회개혁그룹들의 피난처
16세기에 서방에서 루터와 칼뱅의 신앙고백 교회들이 개혁교회로 공인이 된 반면, 체코 개혁그룹은 여전히 불법단체인 이단으로 존재하였습니다. 체코에서의 30년 전쟁인 1621년 백산 전투에서 개혁파들의 패배로 체코 개혁파 박해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체코 보헤미아는 유럽 교회 개혁파들의 피난처 역활을 하였습니다.
교회당국인 바티칸은 이미 1184년 베로나 공의회에서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남프랑스의 왈도파는 알프스 산맥을 타고 이탈리아 쪽 알프스 험산준령에 정착을 시도합니다. 일부는 알프스에서 발원되는 라인강을 따라서 내려와 라인강변에 정착하게됩니다. 그러나 종교재판의 박해가 점점 심화되자 그들은 원시림이 우거진 체코 보헤미아 지경으로 스며들었습니다. 14세기 보헤미아 종교개혁이 꿈틀거리면서 부터, 체코 개혁파들이 30년 전쟁에서 패배한 1621년 6월 21일 이전까지 체코보헤미아는 종교재판의 영향이 미칠 수 없었던 마치 유럽의 교회개혁 그룹들의 해방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재판의 탄압을 피해 왈도 개혁파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1509년 칼뱅이 태어나기전인 50년전에 그의 고향 지역인 북프랑스 피카르디 지역에서 프랑스 교회개혁그룹이 체코 땅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피신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럽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섬나라 잉글랜드에서는 위클리프 (1320년대-1384)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출신의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수도원제도비판, 화체설을 반대, 교황권위 반대, 그리고 역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특히 교황과 교회의 타락에 대해 거칠게 비판을 하여 교회당국으로 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회당국의 눈엣가시였습니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1415년 화형을 당할때, 상징적으로 위클리프가 저술한 모든 책들을 불태우고 그의 무덤을 파헤치는 벌을 내렸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1428년에는 부관참시를 해서 시체를 불태워 그 재를 강에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의 추종자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을 롤라드파라고 합니다.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잉글랜드 군주들의 무덤이 있는데, 거기에 리처드 2세와 그의 부인 앤 왕비의 무덤이 있습니다. 손수건 사용의 시효가 리처드 2세라고 할만큼 멋쟁이 군주였으나, 섹스피어의 비극 가운데 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큼 비운의 왕이었습니다. 그의 앤 왕비는 18살에 국제정세에 의해 정략결혼을 해서 28세에 흑사병으로 자녀도 없이 죽습니다. 바로 이 앤 왕비가 신성황제이자 보헤미아 왕 카렐4세의 네번째 부인에서 출생한 딸입니다. 아주 명석하고 좋은 왕비로 회자되었고, 리처드는 죽을때까지 앤을 그리워했습니다.
이 앤이 자기 아버지 황제 카렐4세가 세운 프라하 카렐대학의 보헤미아 학자들을 초청해서 옥스포드에 유학을 후원하였고, 그들과 함께 위클리프의 글들을 읽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옥스포드 학자들에게 보헤미아의 교회개혁 프로그램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학자들이 공부를 마치고 프라하에 돌아와서 카렐대학에서 위클리프 독서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옥스포드의 롤라드파 출신인 피터 페인(1380년대 – 1455년경)이라는 학자가 종교재판의 박해를 피해 라인강을 따라서 프라하로 역시 옵니다. 이때 라인강을 따라온 그의 여정에서 라인강 지역에 정착한 왈도 개혁파들을 만났습니다.
자연스럽게 프라하는 전유럽의 교회개혁 그룹의 학자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개혁신앙유산을 교류하면서 중세 교회개혁의 정신과 흐름을 형성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최고권위, 성경은 모두가 이해할 수있도록 자신들의 모국어로 번역되고 선포되어야 하며, 말씀아래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교회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며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물적 영적 공동체 실현을 추구하며, 복음은 가장 세상의 높은 윤리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정신이 큰 물줄기를 이루어 100년후인 16세기에 루터와 칼뱅으로 이어져 교회당국은 이 교회개혁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고, 그래서 루터교회와 장로교회가 등장함으로써, 교회개혁은 불행하게도 서방교회의 분열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7. 체코개혁교회의 교회론 형성과 선교이해
불행하게도 중세 교회개혁의 저수지 역할과 모판역할을 한 체코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아래 있어서 1621년 30년 전쟁의 패배로 죽음을 당하던지 아니면 다시 본래의 가톨릭으로 돌아가던지 둘중의 하나의 선택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체코 교회 개혁파들은 망명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고국에서 자신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1918년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체코가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으로 부터 해방이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1781년 황제의 관용에 의해 오스트리아 제국내 루터 칼빈 정교회 신앙고백 그룹들은 박해아래에서 매우 제한되게 지상에 자신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소위 <<관용의 시대>>인 이 시대의 교회와 선교는 박해 속의 조직 교회의 형태로서 근대 개신교회 원형 연구에 매우 중요합니다.
관용의 시대를 포함해서 무려 3백년의 비참한 박해를 견뎌온 체코 개혁그룹들이 1918년 신앙의 자유를 얻어 자신의 교회를 지상에 세운지 얼마되지않아, 반기독교 정치 권력인 공산당의 통치와 억압아래 들어갔습니다. 집회의 자유는 제한되고, 포교의 자유는 금지되었습니다. 모든 교회재산은 국유화되고 목회자들의 사례비는 정부가 종교공무원처럼 봉급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완벽하게 공산당의 통제아래 들어갔습니다. 3백년의 바티칸 종교재판의 박해와 50년의 공산당의 박해아래서 체코 개혁그룹은 멸절되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교회당국 바티칸 종교재판의 감시가 닿지않는 지역에 그들은 스며들어가 그 지역 사람들 속에서 가난한자를 구제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삶의 초대교회의 실현의 정신, 말씀아래서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의 정신 그리고 복음의 높은 도덕성인 사랑의 정신을 실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지역은 그들로 인해 살기좋은 지역이 되고 잘 정비가되고 부유해졌습니다. 그들의 거주는 이 지역을 통치하던 영주들에게 고마운 존재들이되었습니다.
체코 교회개혁 그룹은 이미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양식 자체가 복음증언의 수단임을 알았습니다. 포교가 엄격히 금지된 50년간의 공산당 통치 아래서 이 신앙전통은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삶의 양식은 가장 순수하게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포교를 금지하는 공산 이데올로기와 맞서서 복음을 증언하는 길은 교회와 그 성도들이 자신의 삶으로 믿음의 진정성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체코 크리스천들은 교회 조직을 위해 봉사하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개인의 경건생활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1989년 벨벳혁명으로 자유 민주적 사회질서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보장되는 오늘날의 삶에서 체코 개신교회는 자신들의 문제를 직면할때마다 자신의 정체성으로 돌아가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체코 개신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2013년 정부와 교회간의 교회재산반납과 보상의 법 체결이후 체코교회의 경제적 자립문제입니다. 정부가 돌려줄 교회재산 대부분은 체코 가톨릭의 소유였습니다. 이 법체결이후 체코 가톨릭은 체코내 가장 부유한 단체가 되었고 체코 개신교회는 돌려받을 재산도 미비하고, 그동안 정부가 자신의 목회자들에게 주던 봉급을 이제는 받을 수 없게되었습니다. 체코 개신교회는 재정 자립의 문제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론의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교회 전통인 필요에 따라 나누어쓰고 소유하지 않는 개혁정신을 다시 기억한것 입니다. 재정자립의 문제를 각각 지역교회에게 넘기지 않고 전체교회가 함께 하나의 교회로 해결해 간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8. 박해를 견뎌낸 순례 공동체 교회의 선교모습
이들의 선교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선조인 모라비안 형제들의 선교정신입니다. 모라비안 형제들의 신앙전통은 15세기 체코 보헤미아 종교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415년 얀 후스가 화형을 당한후 얀 쥐시카 (1360년대 -1424년) 라는 걸출한 개혁파 지도자의 신출귀몰한 작전에 의해 개혁파 진압을 위한 십자군의 영향이 보헤미아에서 크게 미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여긴 개혁파들은 신앙을 위한 전쟁은 가능한것인가? 라는 내적 질문을 늘 갖고있었습니다. 같은 시대 체코 종교개혁자 헬치츠키 (1360년대 – 1460년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비폭력의 평화적 저항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평화 사상은 얀 후스를 비롯해서 16세기 코멘스키 (코메니우스)로 이어지는 체코 종교개혁의 중요한 전통입니다. 헬치츠키는 더 나아가 <<교회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발판을 모두 포기하여,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의지할 것이 없어야 온전히 복음에 순종하며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체코 형제단을 출현시켰으며 이들의 후예가 바로 모라비안 형제들입니다. 아울러 퀘이커, 재세례파, 아미쉬, 브라더호프 등이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전통의 모라비안 형제들 선교사들은 박해를 피해 타국으로 망명을 가서 (독일 진젠도르프의 헤른후트), 망명자의 신분으로 해외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후원자도 없었습니다. 농업과 다양한 기술들을 가지고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이들의 선교원칙은, 첫째, 선교사는 현지인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되며, 그들 가운데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 선교사는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와 창조의 문제에 대해 설교를 해야하며 인간의 타락은 후에 말할 수도 있다. 셋째, 선교의 목표는 전체 민족의 복음화가 아니라 각각 개인이 진리를 찾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선교현장을 모두 복음화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현장의 현지인들 속에서 겸손하게 살면서 그들이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를 스스로 찾아가도록 안내하는 역할이 선교의 목표입니다. 이처럼 초기 체코 개혁교회의 정신은 그의 어떤 환경에서도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리게 하는 누룩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려는 신앙 전통을 갖고있습니다.
선교사님 참으로 귀한 강의였습니다. 그리고 , 새로운 교회론에 대하여 특히 공동체적 교회론에 대한 좋은 안내 였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원고를 공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만규 목사
귀한 글 감사합니다. 세미나 때 열심히 메모했는데, 이렇게 글로 올려주시니 너무나 좋습니다!!